전설적인 디자이너 '케네스 제이 레인'의 스타일은 계속된다!
미국 디트로이트 출신의 제이 레인은 어렸을 적부터 남달랐다. 카멜 코트를 사기 위해 방과 후에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패션에 열광했다. 제이 레인은 디트로이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디자인 공부를 위해 고향을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에서 디자인 공부를 마치고 10년 동안 구두 디자인을 했다. 델만(Delman Shoes), 디올(Christian Dior Shoes)에서 구두 디자인을 하며 한 컬렉션에 매치할 장식 슈즈 디자이너로 디자이너 아놀드 스카시(Arnold Scaasi)가 고용하며 제이 레인은 주얼리 디자인에 입문한다. 컬렉션에 어울리는 귀걸이와 팔찌도 디자인하겠다는 그의 제안을 스카시가 수락하자 곧장 싸구려 잡화점으로 향해 플라스틱 팔찌를 사들여 모조 스톤을 그 위에 붙이는 실험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제이 레인은 구두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주말과 야간에 시간을 내 부업으로 틈틈이 보석 디자인을 했다. 그의 보석 디자인이 패션잡지에 소개되자, 텍사스와 뉴욕에 있는 백화점에서 모조 다이아몬드를 사용한 귀걸이 주문 문의가 쇄도했다. 1962년,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이며 저렴한 재료로 만든 커스텀 주얼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미국 상류층과 패션 편집자가 그의 주된 고객층으로 값비싼 파인 주얼리와 섞어서 착용한 제이 레인의 커스텀 주얼리가 인기를 끌며 이름을 알렸다. 당시 가브리엘 샤넬도 커스텀 주얼리를 판매했지만, 샤넬은 상류층을 대상으로 소량 생산한 데 반해 제이 레인은 보다 대중적이고 보편적이었다. 저렴한 보석으로 값싼 주얼리를 만들어 팔고 화려한 비즈니스맨의 삶의 방식을 즐겼다. 패션계에 커스텀 주얼리를 착용하는 게 세련된 디자인이라는 인식을 세워, 대중에게 커스텀 주얼리를 보편화시키는데 앞장섰다. 값싼 재료로 호화 생활을 즐기던 "나 자신이 바로 화려한 가짜거든요!" 그의 말처럼.
우아하고 재치있는 자기비하 발언을 즐기던 제이 레인은 그의 디자인을 “내 디자인은 전부 진품이죠. 다른 누군가의 진품이요.”라 말했다. 전문가조차 진품과 가품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게 카피 제작했다.
제이 레인에게 '좋은 디자인'이란 편집을 잘하는 것이었다. 재클린 여사의 카피 의뢰로 제작한 반클리프 아펠의 ‘마하라니(Maharani)’ 목걸이에 그의 디자인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멋진 디자인을 가져와 실용적으로 바꾸는 것이라 여겨 재클린 여사에게 진짜와 같은 가격을 내거나 카피한 디자인을 대량 판매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재클린 여사는 후자를 택했고 제이 레인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대중화시키는데 입지를 다졌다.
제이 레인은 어디서 영감을 얻은 것인가?
다른 주얼리 디자이너의 작품에서 박물관에 있는 유물까지 보이는 모든 것이 제이 레인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레타 가르보, 낸시 레이건, 다이애나 왕세자빈 등이 그의 주된 고객으로 상류층과 저명인사의 파티에 초대받아 그녀들이 착용한 고가의 파인 주얼리를 다양하게 접했던 것도 제이 레인의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다.
제이 레인은 기존 주얼리 디자이너들이 시도하지 않은 사파이어와 토파즈, 자수정과 산호, 호박과 터키석을 섞어서 사용하는 감각을 보였다. 원하는 인조 보석의 색상이 없자 직접 의뢰해 자신의 작품에 쓰이는 인조 보석을 독일에서 생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커스텀 주얼리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창조보다는 모방에 가까웠지만 '인조 보석'을 고급 패션 아이템의 경지로 끌어올린 업적은 주얼리계에서 찬사를 받기 충분하다. 20세기 커스텀 주얼리를 이끈 '큰 별'은 떨어졌다. 미국 커스텀 주얼리의 대부를 이을 또 다른 '별'이 나타나길 기대해본다.
*매장: 신주쿠에 있는 이세탄 백화점 1층 Time Will Tell 편집 매장에서 Kenneth Jay Lane의 제품을 만날 수 있다.